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니콜라이 고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현재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소설가, 극작가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러시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으며, 초기에는 우크라이나의 민속과 역사를 묘사한 작품을, 후기에는 러시아 관료주의와 사회 부패를 풍자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집 《디칸카 근처의 저녁》, 소설 《타라스 불바》, 희곡 《검찰관》, 소설 《죽은 영혼》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영화, 오페라 등으로 각색되었다. 고골은 러시아 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크라이나의 소설가 - 세르히 자단
    우크라이나 작가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사회 운동가인 세르히 자단은 현대 우크라이나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우크라이나 사회의 현실과 개인의 경험을 독특하게 담아내며, 문화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는 우크라이나 국가 근위대에 입대하여 조국을 수호하고 있다.
  • 우크라이나의 소설가 - 스비틀라나 타라토리나
    스비틀라나 타라토리나는 197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국립 예술 학교에서 교육받고 2000년대 초 대한민국으로 이주하여 현재 한국 국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예술가이다.
  • 우크라이나의 극작가 - 레샤 우크라인카
    레샤 우크라인카는 1871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시인으로, 결핵으로 인해 가정 교육을 받고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시인의 외로움과 우크라이나 민족의 자유를 노래하며 희곡 《숲의 노래》를 남겼고, 러시아 제국에 반대하며 활동하다 1913년 사망했다.
  • 우크라이나의 극작가 - 타라스 셰우첸코
    타라스 셰우첸코는 우크라이나의 시인이자 화가, 민족주의 운동가로서, 시집 《코브자르》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러시아 제국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우크라이나 문학과 민족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국민 시인이다.
  • 굶어 자살한 사람 - 사와라 친왕
    사와라 친왕은 나라 시대의 황족이자 간무 천황의 동생으로,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중 사망 후 스도 천황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원령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 굶어 자살한 사람 - 즉신성불
    즉신성불은 일본 수험도에서 비롯된 불교 수행법으로, 승려들이 엄격한 식이요법과 고행을 통해 미라 상태로 몸을 만들어 단 한 번의 생애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수행 방식이다.
니콜라이 고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폰 묄러의 니콜라이 고골 초상화 (1840년대 초)
오토 프리드리히 테오도르 폰 묄러의 니콜라이 고골 초상화 (1840년대 초)
본명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야놉스키
출생일1809년 4월 1일
출생지벨리키소로친치, 폴타바 현, 러시아 제국
사망일1852년 2월 21일
사망지모스크바, 러시아 제국
묻힌 곳노보데비치 묘지
직업극작가, 단편 소설 작가, 소설가
사용 언어러시아어
활동 기간1840년–1851년
대표 작품디칸카 근교 농장의 야회 (1831–1832)
미르고로드 (단편집) (1835)
검찰관 (희곡) (1836)
(1833–1842)
죽은 영혼 (1842)
서명
이름
러시아어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Nikolay Vasilyevich Gogol)
우크라이나어Микола Васильович Гоголь (Mykola Vasyliovych Hohol)
로마자 표기Mykola Hohol
이전 성야놉스키
문학 사조
사조자연주의

2. 생애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의 우크라이나 코사크 마을인 소로친치에서 태어났다.[11][70] 아버지는 우크라이나 코사크 귀족 출신의 아마추어 극작가였고, 어머니는 코사크 장교의 후손이었다. 가족은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함께 사용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1821년부터 1828년까지 니진의 고등 예술 학교(고등 중학교)에서 공부하며 문학 및 연극에 재능을 보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문학적 성공을 꿈꿨으나, 초기에는 시집 출판 실패와 배우 지망 실패를 겪고 하급 관료로 일했다.

1831년 우크라이나 민담을 소재로 한 소설집 《디칸카 근처의 저녁》 1권을 출판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13] 같은 해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만나 문학적 교류를 시작했으며, 푸시킨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이후 《미르고로드》, 《아라베스크》 등의 작품집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836년 러시아 관료 사회를 풍자한 희곡 《검찰관》이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지지 하에 상연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18][19] 작품에 대한 비판과 논란에 휩싸이자 유럽으로 떠났다. 이후 약 12년간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생활했으며, 특히 로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에 대표작 《죽은 영혼》 집필에 몰두하여 1842년 제1부를 출간했고, 러시아 최고의 산문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타라스 불바》 개작, 《외투》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848년 예루살렘 순례 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깊은 종교적 신념과 정신적 불안정 속에서 창작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죽은 영혼》 제2부 집필에 난항을 겪다가 1852년 완성된 원고 대부분을 불태웠다. 이후 극단적인 단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852년 3월 4일 모스크바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다닐로프 수도원에 안장되었다가 1931년 노보데비치 묘지로 이장되었다.[24]

2. 1. 유년기 및 청년기

고골이 세례받은 우크라이나 벨리키 소로친치의 구세주 현영 교회


1809년 러시아 제국 폴타바현 솔로친치(우크라이나어: Сорочинці, 현재 우크라이나 폴타바주 미르호로드구 벨리키 소로친치)의 작은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11][70] 그의 아버지 바실리 고골-야노프스키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후손으로 '소(小) 귀족'에 속했으며, 아마추어 극작가이자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로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마리야는 신앙심이 깊었으며, 1710년 루브니 연대 장교였던 레온티 코사로프스키의 후손이었다. 고골 가문은 본래 야노우시크이라는 성을 가진 우크라이나 성직자 가문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조부가 혼인으로 영지를 얻어 지주 계급이 되었다. 그러나 1783년 우크라이나에 농노제가 도입되면서 귀족 칭호가 없는 지주의 토지 및 농노 소유가 금지되자, 가문은 흐멜니츠키 봉기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연대장 오스타프 호홀을 시조로 내세우고 성을 호홀리-야노우시크이로 바꾸었다. 고골 역시 자신의 조상 오스타프 호홀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으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코사크 헤트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가족은 당시 좌안 우크라이나 귀족들처럼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하고 폴란드어는 읽는 데 사용하는 등 다중 언어를 구사했다. 어머니는 그를 러시아어 이름 니콜라이와 우크라이나어 이름 미콜라를 합쳐 니콜라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고골은 삼촌 집에서 열리는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12]

1818년, 9세의 고골은 동생 이반과 함께 부모 곁을 떠나 폴타바의 군립 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동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1821년(혹은 1820년)에는 니진(현재 니진 고골 국립 대학교)의 고등 중학교(고등 예술 학교)에 기숙생으로 입학하여 1828년까지 머물렀다. 재학 중 그는 학업보다는 회화와 문학에 더 열중했으며,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연극 재능을 발휘하여 학교 연극에서 노인이나 구두쇠 역할을 뛰어나게 소화했다. 하지만 학교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해 "수수께끼의 난쟁이"라고 불렸으며, 일찍부터 고통스러운 자기 의식과 끝없는 야망이 뒤섞인 어둡고 비밀스러운 성격을 형성했다. 뛰어난 모방 재능은 훗날 자신의 작품을 낭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했고,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1828년 여름, 네진 중학교를 졸업한 고골은 막연하지만 큰 포부를 안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그는 문학적 명성을 얻고자 했고, 낭만주의 시대 독일의 목가적인 삶을 그린 시 Hanz Küchelgarten|한스 퀴헬가르텐de을 'V.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잡지에서 혹평을 받자 크게 실망하여 출판된 시집을 모두 사들여 불태우고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배우가 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하급 관료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가난하고 외로운 경험은 훗날 도시 하층민과 속물적인 인물들을 그린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연작의 바탕이 되었다.

2. 2.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기

1828년, 니진의 고등 중학교를 졸업한 고골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관리와 배우를 지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V. 알로프'라는 필명으로 서사시 《간츠 큐헬가르텐》을 자비로 출판했지만, 혹평을 받자 실망하여 출판된 시집을 모두 사들여 불태워 버렸다. 이후 잠시 독일 뤼베크로 떠났다가 곧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하급 관료로 임용되었다. 이 시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가난하고 쓸쓸했던 경험은 훗날 도시 하층민과 소시민을 그린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작품군의 바탕이 되었다.

1830년, 고골은 첫 산문 작품인 《디칸카 근교 야화》의 일부를 익명으로 『조국 잡지』에 발표했다. 1831년에는 우크라이나 민속을 소재로 한 《디칸카 근교 야화》 1권을 "루디 판코"라는 필명으로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며 단숨에 인기 작가가 되었다.[13] 이듬해인 1832년에는 2권이 출판되었고, 우크라이나어가 많이 사용되어 책 말미에 우크라이나어 단어집이 포함되기도 했다. 이 시기 니콜라이 폴레보이나 니콜라이 나데즈딘과 같은 러시아 편집자들과 평론가들은 고골을 우크라이나 지역 작가로 간주하며 그의 작품을 통해 우크라이나 민족의 특징을 설명하려 했다.[12] 그의 초기 작품들은 동시대 우크라이나 작가 흐리호리 크비트카-오스노비야넨코 등의 작품과 유사점을 보였으나, 고골의 풍자는 훨씬 더 정교하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4]

1831년 초, 고골은 바실리 주코프스키의 소개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만나 깊은 친분을 쌓게 되었다. 푸시킨은 고골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이후 고골의 주요 작품들은 푸시킨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같은 해, 고골은 여성 애국 학교(Women's Patriotic Institute)에 교사직을 얻어 생활이 안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고골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에서 일어난 11월 봉기는 러시아 민족주의를 고조시켰다. 고골은 처음에 폴란드계 성씨인 '호홀리-야노우시크이(고골-야노프스키)'를 사용했으나, 점차 불편함을 느껴 러시아식으로 들리는 '야노프'로 줄이려다 결국 1830년대 후반에는 폴란드계 부분을 완전히 버리고 '고골'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인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의심받고 있다며 자신을 '고골'로만 부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에게 폴란드와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유도하며, 제한적인 우크라이나 민속 문화를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고골은 우크라이나 코사크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키예프의 성 블라디미르 황립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직에 지원하기도 했다. 푸시킨과 교육부 장관 세르게이 우바로프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자격 미달이라는 관료적인 이유로 임용이 거부되었다.[15] 그의 소설 《타라스 불바》는 자포로지예 코사크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이러한 관심사의 결과물이다. 이 시기에 역사학자이자 박물학자인 미하일로 막시모비치와 평생 지속될 우정을 맺었다.[16]

1834년, 고골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황립대학교의 중세사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 직책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의 강의는 재앙과 같았으며, 종종 강의를 빠뜨리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등 기행을 보였다. 결국 1835년 교수직에서 사임했다.[17] 같은 해, 그는 두 권의 이야기집 《미르고로드》와 두 권의 산문집 《아라베스크》를 출판했다. 이 시기부터 스테판 셰비료프와 비사리온 벨린스키 같은 러시아 평론가들은 그를 우크라이나 작가가 아닌 러시아 작가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1] 또한 단편 소설 《코》와 《마차》가 푸시킨이 주재하던 잡지 《동시대인》에 게재되었고, 희곡 《검찰관》 집필에 착수하여 연말에 완성했다.

1836년 4월 19일, 《검찰관》이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18] 러시아 지방 관료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이 희곡은 황제 니콜라이 1세의 개인적인 개입 덕분에 상연될 수 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직접 초연을 관람한 후 "지방의 부패한 관리들을 유쾌하게 조롱하는 것일 뿐, 불온한 점은 없다"고 평가했다고 전해진다.[19] 《검찰관》의 성공으로 고골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지만, 그의 풍자는 동시에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난을 피해 고골은 1836년 유럽으로 떠나게 된다. 이 시점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문학적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2. 3. 해외 체류 시기

1836년 희극 《감찰관》을 알렉산더 극장과 모스크바에서 상연하였다. 이 작품은 진보 세력으로부터는 큰 호응을 얻었지만, 일부 비평가들이 니콜라이 1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이를 차르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자 지배 세력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골 자신은 슬라브주의 운동의 지지자로서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정교회가 신성한 사명을 지녔다고 믿었으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입헌 군주제나 정교회 분리를 주장하는 흐름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러시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다.[35] 그러나 작품에 대한 비판과 오해에 충격을 받은 고골은 결국 로마로 떠났다.

러시아 최초의 고골 기념비(1909년 니콜라이 안드레예프의 인상적인 조각상)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는 대표작인 《죽은 영혼》의 제1부를 완성했다. 이후 스위스, 파리, 로마 등지를 오가며 생활했다. 1836년 말에는 스위스에서 『죽은 영혼』 집필을 이어갔고, 겨울을 나기 위해 12월에는 파리로 갔다. 1837년 파리에서 푸슈킨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로마로 향했으며, 이후 생애의 많은 시간을 독일이탈리아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죽은 영혼』과 『외투』를 집필했다. 1840년 8월 18일 다시 이탈리아로 갔으며, 같은 해 『외투』를 완성했다.

1842년에는 『죽은 영혼』 제1부가 간행되었다. 같은 해 10월, 작품 출판을 위해 러시아로 돌아가려 했으나 검열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고골은 『죽은 영혼』 제1부를 러시아의 부패를 그린 서막으로 생각했고, 제2부와 제3부에서는 주인공의 성장과 영혼 구제, 이상적인 러시아의 모습을 그릴 계획이었다.

1847년, 고골은 『친구들과의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을 출판하여 전제 정치, 농노제, 러시아 정교회를 옹호했다. 이로 인해 과거 그의 후원자였던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 지식인 중 처음으로 칼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을 공개적으로 설파한 벨린스키는 고골이 현 체제를 옹호함으로써 독자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36]

우표, 러시아, 2009년


1848년, 깊은 신앙심에 빠진 고골은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다. 돌아온 후에는 성직자 콘스탄티노프스키의 영향을 받아 문학 활동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이미 써둔 『죽은 영혼』 제2부 원고를 불태웠다. (일부는 소실되지 않고 남아 후에 출판되기도 했다.) 이후 1852년 3월 4일, 극심한 단식 끝에 사망했다.

2. 4. 말년과 죽음

일리야 레핀, 《죽은 영혼》 2부 원고를 불태우는 고골, 캔버스에 유채, 1909년


1848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고골의 건강은 이미 악화된 상태였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미하일 포고딘, 세르게이 아크사코프 같은 친구들의 집과 옛 우크라이나 친구들인 막시모비치, 오시프 보디안스키 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 그는 《죽은 영혼》 제2부 집필을 통해 주인공 치치코프의 긍정적인 변화를 그려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죽은 영혼》은 원래 단테의 《신곡》에 대한 현대판으로 구상되었는데, 제1부는 지옥을 나타냈고, 제2부는 선량한 인물들의 영향으로 치치코프가 점차 정화되고 변모하는 연옥을 그릴 예정이었다.[22]

이후 모스크바로 이주한 고골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정교회 신부 마트베이 콘스탄티놉스키와 관계를 강화했다. 콘스탄티놉스키는 고골에게 창작 활동의 죄악성을 강조하며 파멸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의 광신적인 종교적 영향 아래 고골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빠져 건강이 더욱 나빠졌고 깊은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1852년 2월 24일 밤, 콘스탄티놉스키의 영향 혹은 명령으로 고골은 《죽은 영혼》 제2부 원고 대부분을 포함한 여러 원고를 벽난로에 던져 불태웠다. 그는 나중에 이를 사탄이 자신에게 저지른 장난, 즉 실수였다고 설명했다.

원고를 불태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골은 병상에 누워 음식을 거부했고, 극단적인 사순절 단식으로 인해 9일 후인 1852년 3월 4일 (구력 2월 21일)[76] 극심한 고통 속에서 향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표도르 몰레르가 그린 고골의 초상화 중 하나 (1840년)


장례식은 모스크바 대학교의 성 타티아나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이후 그의 시신은 슬라브주의자 동료였던 알렉세이 호먀코프 근처의 다닐로프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에는 골고다를 상징하는 큰 돌과 러시아 정교회 십자가가 세워졌다.[23]

thumb에 있는 고골의 묘]]

2009년에 복원된 묘소의 원래 디자인. 노보데비치 묘지, 모스크바, 러시아.


1931년 소련 정부가 다닐로프 수도원을 철거하기로 결정하면서 고골의 유해는 노보데비치 묘지로 이장되었다.[24] 이때 그의 시신이 엎드린 자세로 발견되어 그가 산 채로 매장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당국은 골고다 돌을 새 묘지로 옮겼지만 정교회 십자가는 제거했다. 1952년 소련 정부는 이 돌을 고골의 흉상으로 교체했으며, 원래의 돌은 나중에 고골의 숭배자였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묘비로 사용되었다. 2009년 고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흉상은 노보데비치 묘지의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원래의 골고다 돌과 정교회 십자가의 복제품이 다시 세워졌다.[25]

모스크바에 세워진 첫 번째 고골 기념비는 아르바츠카야 광장에 설치된 상징주의 조각가 니콜라이 안드레예프의 작품이었다. 1909년 공개된 이 조각상은 실제 모습보다는 안드레예프가 생각한 고골의 고뇌하는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 일리야 레핀레프 톨스토이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26]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요시프 스탈린은 이 조각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결국 1952년에 보다 정형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기념비로 교체되었다.[27] 안드레예프의 원본 조각상은 파괴될 위기에서 구출되어 현재 고골이 사망한 집 앞에 서 있다.[28]

3. 주요 작품

고골은 그의 작품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관료 사회의 부조리를 예리한 풍자와 사실주의적 필치로 그려냈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시도는 후대 러시아 문학과 연극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골의 주요 작품으로는 우크라이나 민담을 소재로 한 초기 단편집 《디칸카 부근 농가에서의 밤》,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도시 소시민의 삶과 환멸을 그린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연작 (《네프스키 거리》, 《광인일기》, 《》, 《외투》 등 포함), 러시아 사회의 총체적인 부패상을 파헤치려 한 미완의 대작 《죽은 영혼》, 그리고 관료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한 희곡 《감찰관》 등이 꼽힌다. 이 외에도 다수의 단편 소설, 중편 소설, 희곡, 평론 등을 남겼다.

3. 1. 소설

모스크바 니키츠키 대로에 위치한 고골의 기념비


니콜라이 고골은 그의 작품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관료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로운 풍자로써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고골의 사실주의 정신은 이후 러시아 문학과 연극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골의 주요 소설 및 작품집은 다음과 같다.

  • 《간츠 큐헬가르텐》(1829) - 초기 서사시
  • 《디칸카 부근 농가에서의 밤》(1부 1831, 2부 1832): 우크라이나 민담과 생활을 소재로 한 단편집.
  • 〈소로친치 시장〉
  • 〈이반 쿠팔라 전야〉
  • 〈오월의 밤, 혹은 물에 빠져 죽은 처녀〉
  • 〈잃어버린 편지〉
  • 〈크리스마스 전야〉
  • 〈무서운 복수〉
  • 〈이반 표도로비치 슈폰카와 그의 숙모〉
  • 〈마법에 걸린 곳〉
  • 《미르고로드》(1835): 《디칸카 부근 농가에서의 밤》의 속편 격인 단편집.
  • 〈옛날 방식의 지주들〉
  • 타라스 불바》 (1842년 개작)
  • 《비이》
  • 〈이반 이바노비치와 이반 니키포로비치가 싸운 이야기〉
  • 《아라베스크》(1835): 소설, 에세이, 비평 등이 포함된 문집. 주요 소설은 다음과 같다.
  • 네프스키 거리
  • 광인일기
  • 초상화》 (1842년 개작)
  • 》(1836):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단편 소설.
  • 《마차》(1836): 단편 소설.
  • 죽은 영혼》(1부 1842, 2부 일부 1855): 러시아 사회의 총체적인 부패상을 그린 미완의 장편 서사시.
  • 외투》(1842): 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하급 관리의 비극을 그린 단편 소설. 이후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작품집》(1842): 《외투》, 희곡 《결혼》, 《도박사》 등을 묶어 출간.
  •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고골 사후에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그의 주요 단편 소설들을 묶어 출간한 작품집.
  • 〈네프스키 거리〉
  • 〈광인일기〉
  • 〈초상화〉
  • 〈코〉
  • 〈외투〉


고골의 작품은 문학뿐 아니라 러시아의 다른 문화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소설은 오페라와 영화로 여러 차례 각색되었다. 러시아 작곡가 알프레트 슈니트케는 연극 《검찰관》을 위한 부수 음악으로 8악장 구성의 《고골 모음곡》을 작곡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 소설 《코》를 바탕으로 오페라 《코》를 만들었는데, 이는 소비에트 오페라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51] 또한, 고골 탄생 200주년인 2009년을 기념하여 빈 국립 극장은 러시아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에게 고골의 삶을 주제로 한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기도 했다.[52]

고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135편 이상 제작되었으며,[53] 비교적 최근 작품으로는 《하얀 코트의 소녀》(2011) 등이 있다.

3. 2. 희곡


  • 결혼(1835년 집필, 1842년 출판)
  • 도박사(1836년 집필, 1842년 출판)
  • 검찰관(1836년, 일본어 제목: 『사찰관』이라고도 함)

4. 작품 세계와 영향



고골은 작품 속에 당대 러시아의 현실, 특히 지주 사회의 도덕적 해이와 관료 사회의 부조리 및 부패를 날카로운 풍자의 시선으로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의 사실주의 정신은 후대 러시아 문학과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죽은 영혼들》의 삽화가 중 한 명인 표트르 소콜로프.


D. S. 미르스키는 고골의 세계를 "가장 놀랍고, 예상치 못한 – 엄밀한 의미에서 독창적인[29] – 단어의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 중 하나"라고 평했다.[30] 고골은 외부 세계가 기묘하게 변형되는 것을 포착하는 독특한 시각을 지녔는데, 이는 그의 고딕 소설 "끔찍한 복수"나 "저주받은 장소"에서 나타나는 환상적인 공간 왜곡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자연 묘사는 세부 묘사가 끊임없이 중첩되어 사물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인물들은 만화적 기법으로 그려진 캐리커처인데, 이는 두드러진 특징을 과장하고 기하학적 패턴으로 단순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만화들은 설득력, 진실성, 필연성을 지니는데, 이는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예상치 못한 현실 묘사를 통해 달성되며, видимый мир|비디믜 미르rus(보이는 세계) 자체를 빈약하게 보이게 만든다."[31] 안드레이 벨리에 따르면, 고골의 작품은 고딕 로맨스의 등장에 영향을 주었으며, 부조리주의와 인상주의 문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32]

성숙기의 고골이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은 러시아어 단어 ''포슐로스트''(poshlost|포슐로스트rus)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사소함, 진부함, 저속함"을 의미하며, 도덕적, 정신적 함의를 지니고 특정 집단이나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고골은 자신보다 앞선 스턴처럼 기존의 금기와 낭만적 환상을 깨뜨린 위대한 파괴자였다. 그는 숭고함과 아름다움만이 존재하던 영역에 저속함이 자리 잡게 함으로써 러시아 낭만주의의 기반을 흔들었다.[33] "고골의 특징은 곧 완전한 공허함으로 드러나는 무한한 과잉의 감각과 갑자기 형이상학적 공포로 변하는 풍부한 코미디이다."[34] 그의 이야기는 종종 연민과 조롱을 함께 담아내는데, "이반 이바노비치가 이반 니키포로비치와 싸운 이야기"는 유쾌한 익살극으로 시작하여 "세상은 지루하다, 여러분!"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벨린스키는 『죽은 영혼들』이 출판되기 전부터 고골을 러시아 최초의 사실주의 작가이자 자신이 자연주의 학파의 수장으로 여긴 인물로 평가했다. 이 학파에는 곤차로프, 투르게네프,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 블라디미르 달, 블라디미르 솔로구프와 같은 젊거나 덜 알려진 작가들이 포함되었다. 정작 고골 자신은 이러한 문학 운동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생활을 관찰하려는 특별한 열정을 보여준 몇몇 젊은 작가"를 인정하면서도, 그들 작품의 구성과 문체가 미흡하다고 비판했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급진적 비평가들은 수도의 거리를 코가 돌아다니는 세계를 그린 고골을 위대한 사실주의자로 칭송했는데,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고골적 아이러니의 승리"라고 평가절하되기도 했다.[43]

문학 모더니즘 시대에는 고골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평가에도 변화가 생겼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선구적인 연구 중 하나는 에이헨바움의 "외투" 재평가였다. 1920년대 세라피온 형제단으로 알려진 러시아 단편 작가들은 고골을 자신들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여기고 그의 기법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고자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소설가들, 특히 예브게니 자먀틴미하일 불가코프 역시 고골을 존경하며 그의 길을 따랐다. 1926년, 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는 『검찰관』을 "부조리한 상황의 코미디"로 연출하여,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진 부패한 세계를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1934년, 안드레이 벨리는 고골의 문학 기법에 대한 가장 심도 있는 연구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고골 작품에 나타나는 색채 사용, 동사의 인상주의적 활용, 구문의 표현적 불연속성, 문장의 복잡한 리듬 패턴 등 그의 기술적 비밀들을 분석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고골의 걸작들에 대한 요약 설명을 출간했다.[44]

고골이 러시아 문학에 미친 영향은 지속되었지만, 비평가들에 따라 그의 작품 평가는 엇갈렸다. 예를 들어, 벨린스키는 그의 공포 소설을 "죽어가는, 끔찍한 작품"이라고 비난했지만, 안드레이 벨리는 이를 그의 가장 양식적으로 대담한 창작물 중 하나로 평가했다. 나보코프는 특히 『죽은 영혼들』, 『검찰관』, "외투"를 천재적인 작품으로 칭송하며, "고골이 그의 불멸의 '외투'에서처럼 정말로 마음껏 표현하고 그의 개인적인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행복하게 걸었을 때, 그는 러시아가 아직까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45] 비평가들은 전통적으로 "외투"를 "인도주의적 사실주의"의 걸작으로 해석했지만, 나보코프와 일부 다른 독자들은 "언어의 구멍"이 이 이야기를 "작은 사람"의 유령 같은 이중성에 대한 초자연적인 이야기로 해석할 여지를 준다고 주장했다.[46] 고골의 모든 소설 중에서 "코"는 모든 난해한 해석을 완강히 거부해왔다. D.S. 미르스키는 이를 "순수한 유희, 거의 순수한 넌센스"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코"는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및 포스트식민주의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작품 속 유대인 묘사는 고골에게 반유대주의라는 평판을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시오니스트 작가 제브 자보틴스키는 고골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여한 러시아 유대인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그의 글뿐만 아니라 동시대 작가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에서도 명백한 반유대주의를 지적했다.[47] 예를 들어, 펠릭스 드레이진과 데이비드 구아스파리는 『러시아 영혼과 유대인: 문학적 민족 중심주의 에세이』에서 "유대인 캐릭터의 중요성과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에서 우크라이나 유대인 공동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논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화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적 편견에 대한 고골의 동조를 지적했다.[48] 레온 폴리아코프는 『반유대주의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타라스 불바』의 '얀켈'은 실제로 러시아 문학에서 전형적인 유대인이 되었다. 고골은 그를 지극히 착취적이고, 비겁하고, 혐오스럽지만, 감사를 표할 줄 아는 인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그와 그의 일당이 드니에프르 강에서 코사크 영주들에게 익사당하는 것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얀켈은 우스꽝스럽고, 고골이 사용한 털 뽑힌 닭의 이미지는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에게 널리 퍼졌다."[49]


이러한 유대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고골은 그의 문학적 유산을 이어받은 유대인 작가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아멜리아 글레이저는 고골의 문학적 혁신이 숄렘 알레이헴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의 글쓰기의 많은 부분과 심지어 그의 외모를 고골을 모델로 삼기로 결정했다... 숄렘 알레이헴이 고골로부터 빌려온 것은 위험했을 수도 있지만 집단 기억의 힘을 통해 독자를 통합할 수 있는 시골 동유럽 풍경이었다. 그는 또한 고골로부터 웃음을 통해 이 위험을 완화하는 법을 배웠고, 고골의 유대인 캐릭터를 자주 다시 쓰면서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수정하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50]



고골의 초기 작품은 주로 에른스트 호프만을 비롯한 유럽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밝은 유머와 낭만주의적 환상성을 특징으로 한다. 오래된 슬라브 문학슬라브 신화 역시 고골에게 강한 영향을 주어 많은 플롯의 기반이 되었다.

중기 이후 작품에서는 지방 지주들의 안일한 삶과 상트페테르부르크 하급 관리 및 하층민들의 일상을 현실적이면서도 극도로 과장되게 묘사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그들의 속물근성, 공허함, 비천함에 대한 작가의 절망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탄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문체를 보여준다. 이러한 웃음은 『외투』의 "인도주의적 부분"이나 『죽은 영혼들』 제1부에서 두드러지는 서정적 탄식 등에서 종종 "눈물을 통한 웃음"으로 불린다.

고골 작품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 문화 내 서구파와 슬라브파(민족주의파)의 대립을 반영한다. 제정 러시아에 비판적이었던 급진 지식인들은 고골의 작품을 추악한 현실 사회를 비추는 "사회 비판"이자 "사회 개혁"을 지향하는 "풍자 문학"으로 해석했다. 『코』나 『외투』 등에서 보이는 환상적 요소는 엄격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고골의 견해는 평론, 서간, 회고록 등에서 드러나듯 시야가 좁고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의 필생의 역작이 될 『죽은 영혼들』 집필의 근저에는 일종의 이상주의가 있었지만, 이는 러시아 체제 자체의 변혁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제1부에서 주인공의 과오를, 제2부에서 그 교정을 그림으로써 러시아 민중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 과거의 좋은 러시아를 되살리려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부정적이고 추악한 면을 과장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는 데 뛰어났던 고골에게 제2부 창작은 힘겨운 과제였다. 이 때문에 집필은 지연되었고, 반대로 러시아 민중 교화와 러시아 재생에 대한 열망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갔다. 말년에 고골은 『친구와의 왕복 서간선』 발표를 통해 종교적 광신과 체제 찬미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마지막 저작은 그를 체제 비판자로 여겼던 자유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보수 반동적인 슬라브파로부터도 통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고골의 사상적 변화를 작품 해석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그의 작품 해석에 대한 분열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구파와 진보파는 『죽은 영혼들』 제1부까지의 고골 전반기 작품에서 웃음과 풍자를 통한 체제 비판을 읽어내고, 신비주의 및 보수 사상이 드러나는 후반기 작품은 종교적 미망에 의한 변절로 치부했다. 반면, 고골 말년의 복고적 유토피아 사상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의 전 작품에 범슬라브주의 사상이 관통한다고 해석하는 슬라브파적 독해도 나타났다. 이러한 해석은 벨린스키의 비평과 더불어 고골을 자연파의 대표자,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이자 인도주의자로 보는 소련의 공식 견해로 이어졌다.

한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등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에 대해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 이후 이의를 제기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후대 러시아 문학에 고골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오랫동안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시조로 여겨졌지만,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환상성, 세부 묘사의 과장, 그로테스크한 기법 등이 20세기 문학에 미친 영향 또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드미트리 메레시코프스키, 예브게니 자먀틴, 미하일 불가코프, 안드레이 시냐프스키(아브람 테르츠) 등은 이러한 전통을 강하게 의식했다. 1920년대 호프만 작품 등장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문학 서클 『세라피온 형제』는 유명하다.

고골은 일본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고구마죽』은 도입부가 『외투』와 매우 유사하며, 우노 코지의 다변 스타일, 고토 아키오의 『웃음 지옥』, 『협공』 등 고골의 소설 작법을 참고한 작품이 다수 존재한다.

5. 한국 문학과 사회에 미친 영향

(해당 섹션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없어 작성할 수 없습니다.)

6. 평가와 논란



일부 비평가들이 니콜라이 1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고골의 희곡 『검찰관』을 차르 체제에 대한 고발로 해석하자 고골은 충격을 받았다. 고골은 슬라브주의 운동의 신봉자였으며,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정교회 모두 신이 부여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처럼 고골은 입헌 군주제와 정교회의 분리를 설파하는 러시아인들에게 강력하게 반대했다. 고골은 자신의 작품을 러시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비판으로 여겼다.[35]

고골은 저서 『친구들과의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1847)에서 전제 정치, 농노제, 정교회를 옹호한 후 그의 전 후원자 비사리온 벨린스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러시아 지식인 중 최초로 칼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을 공개적으로 설파한 벨린스키는 고골이 현상 유지를 옹호함으로써 독자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36]

벨린스키는 『죽은 영혼들』 출판 전부터 고골을 최초의 러시아어 사실주의 작가이자 그가 자연주의 학파의 수장으로 인정했으며, 그 학파에 곤차로프, 투르게네프,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 블라디미르 달, 블라디미르 솔로구프와 같은 젊거나 덜 유명한 작가들을 포함시켰다. 고골 자신은 그러한 문학 운동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실생활을 관찰하려는 특별한 열망을 보여준 몇몇 젊은 작가"를 인정했지만, 그들의 작품의 결함 있는 구성과 스타일에 대해 비난했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비평가들의 후세대는 고골(러시아 수도의 거리를 코가 돌아다니는 세계의 작가)을 위대한 사실주의자로 칭송했으며,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고골적인 아이러니의 승리"로 폄하되었다.[43]

문학 모더니즘 시대는 고골 작품에 대한 관심 부활과 태도 변화를 가져왔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선구적인 작품 중 하나는 에이헨바움의 "외투" 재평가였다. 1920년대에 세라피온 형제단으로 알려진 러시아 단편 작가들은 고골을 그들의 선구자 중 하나로 여기고 그의 기법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려 했다. 이 시기의 주요 소설가들, 특히 예브게니 자먀틴미하일 불가코프도 고골을 존경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1926년, 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는 『검찰관』을 "부조리한 상황의 코미디"로 연출하여 매혹적인 관객들에게 끝없는 자기 기만의 부패한 세상을 드러냈다. 1934년, 안드레이 벨리는 고골의 문학 기법에 대한 당시까지 가장 세심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고골 작품에 만연한 색상, 동사에 대한 인상주의적 사용, 그의 구문의 표현적 불연속성, 그의 문장의 복잡한 리듬 패턴 및 그의 기술의 다른 많은 비밀을 분석했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고골의 걸작에 대한 요약된 설명을 발표했다.[44]

thumb』 2부 원고를 태운 벽난로가 있다.]]

고골의 러시아 문학에 대한 영향은 지속되었지만, 다양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다르게 평가했다. 예를 들어, 벨린스키는 그의 공포 소설을 "죽어가는, 끔찍한 작품"이라고 비난했지만, 안드레이 벨리는 그것들을 그의 가장 스타일적으로 대담한 창작물 중 하나로 꼽았다. 나보코프는 특히 『죽은 영혼들』, 『검찰관』, "외투"를 천재성의 작품으로 칭찬하며, "고골이 그의 불멸의 '외투'에서처럼 정말로 마음껏 표현하고 그의 개인적인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행복하게 걸었을 때, 그는 러시아가 아직까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라고 선언했다.[45] 비평가들은 전통적으로 "외투"를 "인도주의적 사실주의"의 걸작으로 해석했지만, 나보코프와 다른 몇몇 주의 깊은 독자들은 "언어의 구멍"이 이 이야기를 "작은 사람"의 유령과 같은 이중성에 대한 초자연적인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46] 고골의 모든 소설 중에서, "코"는 모든 난해한 해석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D.S. 미르스키는 그것을 "순수한 유희, 거의 순수한 넌센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코"는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및 포스트식민주의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유대인 캐릭터의 묘사는 고골이 반유대주의로 평판을 얻게 했다. 이러한 묘사로 인해, 러시아 시오니스트 작가 제브 자보틴스키는 고골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여한 러시아 유대인들을 비난했다. 후기 비평가들은 또한 그의 저술뿐만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저술에서도 명백한 반유대주의를 지적했다.[47] 예를 들어, 펠릭스 드레이진과 데이비드 구아스파리는 그들의 저서 『러시아 영혼과 유대인: 문학적 민족 중심주의 에세이』에서 "유대인 캐릭터의 중요성과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에서 우크라이나 유대인 공동체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논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문화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적 편견에 대한 고골의 애착을 지적했다.[48] 레온 폴리아코프의 『반유대주의의 역사』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타라스 불바』의 '얀켈'은 실제로 러시아 문학에서 전형적인 유대인이 되었다. 고골은 그를 지극히 착취적이고, 비겁하고, 혐오스럽지만,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그와 그의 일당이 드니프로강에서 코사크 영주들에게 익사하는 것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무엇보다 얀켈은 우스꽝스럽고, 고골이 사용한 털 뽑힌 닭의 이미지는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에게 널리 퍼졌다."[49]


유대인 캐릭터에 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고골은 그의 문학적 유산을 물려받은 유대인 작가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아멜리아 글레이저는 고골의 문학적 혁신이 숄렘 알레이헴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글쓰기의 많은 부분과 심지어 그의 외모를 고골을 모델로 삼기로 결정했다... 숄렘 알레이헴이 고골로부터 빌려온 것은 위험했을 수도 있지만 집단 기억의 힘을 통해 독자를 통합할 수 있는 시골 동유럽 풍경이었다. 그는 또한 고골로부터 웃음을 통해 이 위험을 완화하는 법을 배웠고, 고골의 유대인 캐릭터를 자주 다시 쓰면서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수정하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했다."[50]



고골의 초기 작품은 주로 에른스트 호프만을 비롯한 유럽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대체로 밝은 유머와 낭만주의적 환상성을 특징으로 한다. 오래된 슬라브 문학도 고골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슬라브 신화에서도 많은 플롯을 만들어냈다.

중기 이후의 작품에서는 지방 지주들의 안일한 일상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급 관리·하층 계급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현실적이고 상세하며 극도로 과장된 묘사에서 오는 웃음과, 그들의 속악함, 공허함, 비천함에 대한 작가의 절망과 두려움에서 오는 탄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그 웃음은 『외투』의 "인도주의적 부분"이나, 『죽은 영혼들』 제1부에 현저한 서정적 탄식 등에서 종종 "눈물을 통한 웃음"이라고 불린다.

고골 작품에 대한 평가는 러시아 문화에서 자파드니키와 슬라브파 (민족주의파)의 분열·상극을 반영하고 있다. 제정에 불만을 품은 급진적인 지식인들은 고골의 작품을 추악한 현실 사회를 비추는 "사회 비판" "사회 개혁"을 지향하는 "풍자 문학"으로 받아들였다. 『코』나 『외투』 등에서 보이는 공상적 요소에 대해서는 가혹한 검열에 대한 눈가림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한 고골의 견해는, 평론이나 서간, 회고록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시야가 좁고 매우 보수적이었다. 생애의 대작이 될 『죽은 영혼들』을 쓴 근저에 일종의 이상주의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러시아 체제 자체의 변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제1부에서 주인공의 과오를, 제2부에서 그 교정을 그림으로써, 러시아 민중을 도덕적으로 깨우치고, 옛날의 좋은 러시아를 재생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부정적이고 추악한 면을 과장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리는 데 뛰어난 고골에게, 제2부의 창작은 버거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집필은 지연되었고, 그것과는 반대로 러시아 민중의 교화와 러시아 재생에 대한 기원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갔다. 만년에는 고골은 『친구들과의 서신에서 발췌한 내용』의 발표를 통해 종교에 대한 광신과 체제에 대한 찬미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마지막 저작은 그전까지 고골을 체제 비판자로 믿었던 자유주의자뿐만 아니라 보수 반동의 슬라브파 사람들로부터도 통렬한 비판을 받았고, 고골의 사상적 추이를 작품의 해석에 어떻게 결부시킬 것인가 하는 점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의 분열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서구파·진보파는 『죽은 영혼들』 제1부까지의 고골 전반생 작품군에 웃음과 풍자에 의한 체제 비판을 읽어내고, 신비 사상·보수 사상이 보이는 후반생 작품군을 어디까지나 종교적 미망에 의한 전향으로 잘라냈다. 그들은 또한 고골 만년의 복고적 유토피아 사상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고골의 전 작품에 범 슬라브 사상이 관통한다고 읽어내는 슬라브파적 독해가 일어났다. 이 해석은 벨린스키의 비평과 더불어 고골을 자연파의 대표자,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시조이자 인도주의자로 보는 소련 공식 견해로 이어졌다.

한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등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독해에 대해 20세기 초두의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 이후 이의를 제기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후대의 러시아 문학에 고골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고골은 오랫동안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시조로 여겨졌지만, 그 작품의 환상성, 세부의 과장, 그로테스크한 수법 등이 20세기 문학에 미친 영향도 중시되고 있다. 드미트리 메레시코프스키, 예브게니 자먀틴, 미하일 불가코프, 안드레이 시냐프스키 (아브라함 테르츠) 등은 그 전통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 호프만의 작품 등장인물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문학 서클 『세라피온 형제단』은 유명하다.

고골은 또한 일본 문학에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고구마죽』은 도입 부분이 『외투』와 매우 유사하며, 우노 코지의 다변, 고토 아키오의 『웃음 지옥』 『협공』 등, 고골의 소설 작법을 배운 작품이 많이 존재한다.

7. 각색

고골의 작품은 오페라와 영화 등 다양한 매체로 각색되었다. 러시아 작곡가 알프레트 슈니트케는 연극 《검찰관》을 위한 부수 음악으로 8악장 구성의 《고골 모음곡》을 작곡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1928년 고골의 단편을 바탕으로 《코》를 자신의 첫 오페라로 만들었다.[51] 2009년 고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빈 국립 극장은 러시아 작곡가 레라 아우어바흐에게 고골의 삶을 주제로 한 오페라의 작곡과 대본을 의뢰하기도 했다.[52]

고골의 단편 소설 "크리스마스 이브" (러시아 원제 «Ночь перед Рождеством»|노치 페레드 로주데스트봄ru, 문자 그대로 "크리스마스 전날 밤"으로 번역됨)는 여러 작곡가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우크라이나 작곡가 미콜라 리센코는 1872년 미하일로 스타리츠키가 우크라이나어로 쓴 대본으로 오페라 ''크리스마스 이브''를 작곡했다. 1874년에는 차이콥스키가 야코프 폴론스키의 러시아어 대본으로 같은 이야기를 ''대장장이 바쿨라''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만들었고, 1885년에 이를 ''체레비치키 (여황제의 슬리퍼)''로 개정했다. 1894년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직접 대본과 음악을 쓴 동명의 오페라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1961년 영화 크리스마스 전날 밤으로도 각색되었다.

고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135편 이상 제작되었으며[53], 가장 최근작은 2011년의 《하얀 코트의 소녀》이다. 특히 소설 "비이"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는데, 1967년작 ''비이'', 2006년 공포 영화 ''베드마''(일명 ''공포의 힘''), 2014년 액션 공포 영화 ''비이'', 2018년 공포 영화 ''고골 비이'' 등이 있다. 또한 러시아의 FMV 게임 ''비이: 다시 이야기된 이야기''(2004)로도 각색되었으며, 이탈리아 영화 ''블랙 선데이''(1960)와 한국 공포 영화 ''요괴전''(2008)에 영감을 주었다. 2016년에는 단편 소설 "초상화"를 원작으로 한 동명 장편 영화 제작이 발표되었다.[61][62][63][64][65][66]

러시아 TV-3의 텔레비전 시리즈 ''고골''은 니콜라이 고골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의 삶과 작품 속 요소들을 혼합한 허구적 이야기를 다루었다.[67] 이 시리즈의 에피소드들은 2017년 ''고골. 시작''을 시작으로 ''고골. 비이''(2018), ''고골. 끔찍한 복수''(2018)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극장 개봉되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알렉상드르 알렉세예프와 클레어 파커가 핀스크린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여 "코"를 각색한 단편 애니메이션을 1963년 캐나다 국립 영화 위원회에서 제작했다.[68] 또한 "코"를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한 ''코 또는 매버릭 음모''가 약 50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2020년에 개봉되었다.[69]

BBC 라디오 4는 2002년 ''세 명의 이반, 두 명의 고모와 외투''라는 제목으로 그리프 리스 존스와 스티븐 무어가 출연한 6개의 고골 단편 소설 각색 시리즈를 제작했다. 각색된 작품은 "두 명의 이반", "외투", "이반 표도로비치 폰카와 그의 고모", "코", "수수께끼의 초상화", "어느 미치광이의 수기"였다. 단편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담 비슨에 의해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되어 2008년 12월 24일 BBC 라디오 4에서 처음 방송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재방송되었다.[59][60]

참조

[1] 서적 Gogol http://dictionary.re[...] Random House 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
[2] 서적 Nikolai Gogol: Between Ukrainian and Russian Nation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Creation of Nikolai Gogol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06-30
[4] Interview with Vladimir Voropaev Gogol: russe et ukrainien en même temps https://www.lexpress[...] 2009-04-09
[5] 서적 On the dissimilarity of the similar Sovetsky Pisatel
[6] 간행물 The Nationalism of Nikolai Gogol': Betwixt and Between? https://web.archive.[...] 2007-09-00
[7] 간행물 Gogol's Research on Ukrainian Customs for the Dikan'ka Tales 1997-04-00
[8] 웹사이트 Очень нервный вечер. Как Николай I и Гоголь постановку «Ревизора» смотрели https://aif.ru/cultu[...] Argumenty i Fakty 2016-05-01
[9] 웹사이트 Natural School (Натуральная школа) http://www.hrono.ru/[...] Brief Literary Encyclopedia in 9 Volumes. Moscow 1968
[10] 백과사전 Nikolai Gogol
[11] 백과사전 Nikolay Gogol https://www.britanni[...]
[12] 서적 Nikolai Gogol: Between Ukrainian and Russian Nation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13] 간행물 “Allusions to Hoffmann in Gogol’s Ukrainian Horror Stories from the Dikan'ka Collection.” 2009-06-00
[14] 서적 The Enigma of Gogol: An Examination of the Writings of N.V. Gogol and Their Place in the Russian Literary Traditio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04-30
[15] 서적 The Anguish of Mykola Ghoghol, a.k.a. Nikolai Gogol Canadian Scholars' Press
[16] 웹사이트 Welcome to Ukraine http://www.wumag.kie[...] Wumag.kiev.ua
[17] 서적 A Concise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Volume I from the Beginnings to Checkhov New York University Press
[18] 웹사이트 The Government Inspector http://www.act-sf.or[...] 2008
[19] 웹사이트 Очень нервный вечер. Как Николай I и Гоголь постановку «Ревизора» смотрели https://aif.ru/cultu[...] Argumenty i Fakty 2016-05-01
[20] 웹사이트 Le nom de Nikolaï Gogol est immortalisé à la place de la Bourse à Paris http://fr.rbth.com/a[...] 2013-06-24
[21] 간행물 Is Gogol's 1842 Version of Taras Bul'ba really 'Russified'? 2010-2011
[22] 문서 Gogol's statement on Dead Souls
[23] 뉴스 Могиле Гоголя вернули первозданный вид: на нее поставили "Голгофу" с могилы Булгакова и восстановили крест http://www.newsru.co[...]
[24] 뉴스 Novodevichy Cemetery http://www.passportm[...] 2008-04-00
[25] 뉴스 Могиле Гоголя вернули первозданный вид: на нее поставили "Голгофу" с могилы Булгакова и восстановили крест http://www.newsru.co[...]
[26] 웹사이트 Российское образование. Федеральный образовательный портал: учреждения, программы, стандарты, ВУЗы, тесты ЕГЭ. https://web.archive.[...]
[27] 웹사이트 Зачем Сталин убрал памятник Гоголю в Москве https://rg.ru/2017/0[...] rg.ru 2017-06-01
[28] 웹사이트 Российское образование. Федеральный образовательный портал: учреждения, программы, стандарты, ВУЗы, тесты ЕГЭ. https://web.archive.[...]
[29] 문서 Gogol's influences
[30] 서적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31] 서적
[32] 서적 The Mastery Of Gogol http://gogol-lit.ru/[...] Ogiz 1934
[33] 서적 Essays on Gogol: Logos and the Russian Word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34] 백과사전 Russian literature
[35] 웹사이트 Очень нервный вечер. Как Николай I и Гоголь постановку «Ревизора» смотрели https://aif.ru/cultu[...] Argumenty i Fakty 2016-05-01
[36] 웹사이트 Letter to N.V. Gogol https://www.marxists[...] marxists.org 2008-02-00
[37] 서적 Nikolai Gogol: Between Ukrainian and Russian Nationalism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02-28
[38] 서적 Nikolai Gogol: Performing Hybrid Identit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21-02-26
[39] 서적 Literary Biographies in The Lives of Remarkable People Series in Russia: Biography for the Masse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22-03-14
[40] 학술지 Nikolai Gogol: Performing Hybrid Identity by Yuliya Ilchuk (review) https://muse.jhu.edu[...] 2022-00-00
[41] 학술지 Nikolai Gogol: Performing Hybrid Identity by Yuliya Ilchuk (review) https://muse.jhu.edu[...] 2023-00-00
[42] 서적 Gogol Duke University Press
[43] 백과사전 Russian literature Britannica 2018-12-00
[44] 서적 Nikolai Gogol New Directions 2017-00-00
[45] 서적 Nikolai Gogol https://books.google[...] New Directions 2017-00-00
[46] 문서 The Double
[47] 서적 Russian Intellectual Antisemitism in the Post-Communist Er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48] 웹사이트 Antisemitism in Literature and in the Arts https://web.archive.[...] Sicsa.huji.ac.il 2013-09-26
[49] 서적 The History of Antisemitism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50] 뉴스 Sholem Aleichem, Gogol Show Two Views of Shtetl Jews http://www.jewishjou[...] The Jewish Journal 2009-03-11
[51] 음반 Gogol Suite http://www.cdunivers[...] CD Universe
[52] 웹사이트 Zwei Kompositionsaufträge vergeben https://web.archive.[...] wien.orf.at 2011-07-25
[53] 웹사이트 Nikolai Gogol https://www.imdb.com[...] IMDb
[54] 웹사이트 200 лет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Н.В.Гоголя (1809–1852), писателя https://web.archive.[...] marka-art.ru 2009-03-22
[55] 웹사이트 Stamps issued for the 200th anniversary of N.V. Gogol's birthday https://web.archive.[...] kraspost.ru 2012-03-17
[56] 웹사이트 Coupling for the 2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Mykola Hohol (1809–1852) http://www.stamp.kie[...] Ukrposhta 2016-06-00
[57] 웹사이트 Ukraine is preparing to celebrate the 200th anniversary of Nikolai Gogol's birth https://web.archive.[...] otpusk.com 2014-08-19
[58] 사진 Events by themes: NBU presented an anniversary coin «Nikolay Gogol» from series "Personages of Ukraine" http://photo.unian.n[...] UNIAN 2009-03-19
[59] 웹사이트 Christmas Eve https://web.archive.[...] BBC Radio 4 2009-01-10
[60] 웹사이트 Nikolai Gogol – Christmas Eve http://www.bbc.co.uk[...] BBC Radio 4 Extra 2015-12-24
[61] 웹사이트 Patrick Cassavetti boards Lenin?! http://www.screendai[...]
[62] 웹사이트 Gogol's short story The Portrait to be made into feature film https://web.archive.[...] russianartandculture.com 2016-04-10
[63] 뉴스 David Oakes, Simon Callow to star in Russian period drama 'The Portrait' http://www.screendai[...] Screen International 2016-02-12
[64] 웹사이트 Gogol’s “The Portrait” adapted for the screen by an international team of talents https://web.archive.[...] Russian Art and Culture 2016-07-01
[65] 웹사이트 Звезда «Дома солнца» сыграет в экранизации рассказа Гоголя «Портрет» https://web.archive.[...] Kinodata.Pro 2019-05-03
[66] 웹사이트 Британцы снимутся в экранизации Гоголя https://web.archive.[...] Britshow.com 2018-08-29
[67] 뉴스 Сериал о Гоголе собрал за первые выходные в четыре раза больше своего бюджета https://www.vedomost[...]
[68]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World Cinem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996-00-00
[69] 뉴스 Если бы речь шла только об отрицании, пароход современности далеко бы не уплыл https://www.kommersa[...] 2020-11-28
[70] 서적 隊長ブーリバ 1970-00-00
[71] 서적 隊長ブーリバ 1970
[72] 서적 Oleh S. Ilnytzkyj. Nikolai Gogol: Ukrainian Writer in the Empire: a Study in Identity University of Alberta, Edmonton, Canada 2024-07-22
[73] 영화 타라스 불바 (2009년 영화) http://www.youtube.c[...]
[74] 뉴스 고골리는 누구의 것인가 http://www.iza.ne.jp[...] 산케이 신문 2014-04-09
[75] 뉴스 외투 한 벌, 구두 한 켤레…누군가에겐 생존·존엄성 문제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4-01-20
[76] 서적 타라스 불바 https://books.google[...] (주)민음사 2012-10-08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